대학생 그 시절, 나의 경제 독립기

내용 무관 / 리야드 도시 풍경

이 글은 서막과 총 4개의 장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생이 된 후에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먼저 쓰는 결론. 분산하지 않고 하나의 초점을 맞춰더라면...


경제적 독립을 한 활동중에는 학생 포트폴리오 대회라는 활동이 있었다. 
대학교 때 했던 활동에 대해 정리하여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내 포트폴리오가 한 500페이지로 구성되었다.
그 만큼 많은 활동을 했고,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분명히 그 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되었지만,
이러한 아쉬움도 있다. 만약 그 때 했던 노력들을 한 분야에만 집중했다면,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내 분야에 대해 확신은 못하는 것처럼 그 때는 아는 것도 없었기에, 딱 한 분야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혹시 자신이 확신 하는 방향이 있는 분이라면, 그 분야에 집중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서막. 돈은 쉽게 벌리지 않는다.


내 위로는 형이 있고, 그 위로는 작은누나와 큰 누나도 있다.
형도 누나들도 대학교를 다니면서 딱히 집에다가 손을 벌리지 않았기에 나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참고로 사립대학교 공대를 갔는데 등록금과 입학금을 합하면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대학교가 결정이 난 것을 아니었지만, 

왠지 그 대학에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능이 끝난 다음날부터 등록금을 생각해보았다.
오전에는 학교를 가야했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익산은 아르바이트도 많지 않았기에 돈을 버는 선택의 폭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수능 다음날부터 제일 먼저 했던게 야간 상하차였다. 계속 들어오는 트럭의 박스를 내리는 일은
키 172 / 몸무게 50kg 당시 나에게는 쉽지 않았고  매일매일 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꽤 적지 않을 횟수를 꾸준히 갔었고, 주말에는 웨딩홀에서 그릇을 치웠다.

하지만 2월 중순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때 수중에 있는 돈은 2백만원 남짓이였고,
등록금과 입학금은 벌지 못해서 결국은 첫학기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1장은 아르바이트로는 등록금을 벌지 못하지.


남들처럼 OT를 다녀오고, 동아리를 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니 3월이 지나갔다.
수중에는 돈을 떨어져갔고, 중간고사 중간쯤 하니 겁이 났다. 생활비가 떨어지는 것보다
4백 만원이 넘는 등록금 X 8번, 기숙사비 들을 전부 다 학자금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5천만원이었다.

그 때 야간상하차 한 번 갔다오면 5만원 줬는데, 천 번을 해야할 횟수였기에 이전과 다른 생활을 했다.
나는 중간고사 이후부터는 동아리도 그만두고고, 

학교 앞 뚜레주르에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시간이 남을 때는 도서관을 갔다. 
도서관에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대학에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술먹고 노는 것은 대학 오기전에도 친구들과 많이 했었는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달랐다.
참고로 우리학교 도서관과 그 앞은 사색의 광장이라고 불리는데 도서관 2층 창문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참 좋았다. 
기겁 공부해야 교양과 전공기초이지만 그 순간이 나름 좋았다.
다행히 기말고사 덕분인지 1학기 성적은 좋았고, 2학기는 성적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생긴 종종 도서관을 가는 습관 때문에 8학기 

내내 1학기때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글을 쓰는 것부터, 새로운 돈을 버는 방법


2학기 때, 글쓰기 수업을 드는데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을 다 썻으면 저장하지 말고,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써'보라고 그 당시에는 나는 시간이 많았다.
그 때는 뚜레주르를 그만두고, 평일에는 아르바이트를 안하고 주말에 가구조립 알바를 했는데 주말 이틀 일하면
그래도 10만원을 넘게 벌어서 생활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글쓰기나 인문학 수업의 글쓰는 과제들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지우고 다시 썼다. 
렇게 써논 글을 모아서, 2012년 초(3학기)에 '성년, 너의 꿈을 말해봐!'라는 대회에 공모해서 상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는 상금을 현금으로 주지않고, 상품권으로 주었는데 작은누나가 현금으로 바꿔준 걸로 기억이 난다.
상금은 20만원인가 30만원인가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때 당시 내게는 큰 놀라움이었다. 아르바이트 말고도 돈을 벌 수 있다니
그 때부터 종종 학교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종류와 마구잡이로 대회에 나간 것 같다.

대회, 다른 말로해서 공모전을 할 때마다 꼭 세가지는 했다.
1. 지난 수상작 조사  2. 출품작 한 번 만들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 3. 적어도 세 번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 받기

때로는 기대를 많이해서 스트레스도 받은 적도 있지만, 나름 취미처럼 즐긴 활동이다.
보통 학기마다 적게는 50만원에서 많게는 150만원정도까지 상금을 받은 것 같다.
사실 이 활동에서 가장 좋았던 거는 방학이 끝날 때마다 3~4개 정도의 상장을 가지고 집에 갔는데
엄마가 굳이 그 상장들을 눈에 보이는 곳에 쌓아놓고, 친척들이나 주변분들한테 자랑하는 모습이 기분이 좋았다.

 

 

 

 

 

 

 

 

 

 

 

 

 

 

 

 


3장. 교직원들의 사랑을 받다.


나는 교직원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당시 대학의 여러 부서에서는 정부지원사업으로 하는 활동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학습 포트폴리오라고 해서 이번에 내가 수강하는 수업에 대해 매주 학습한 내용을 메모해서
지정된 사이트에 올리면 학기가 끝나면 30만원을 지원금을 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러한 활동은 핵심은 끝까지 꾸준히 활동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다. 너무 잘할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꾸준히 보고서를 잘 올렸다. 그리고 교직원분들은 부서가 달라도
서로가 서로를 잘알았고, 한 부서의 활동을 잘하면, 다른 부서 활동도 참여하기 쉬워진다.

나는 참고로 매번 어떤 활동을 지원하고 나면, 그 부서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서 꼭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다.이 활동이 어떤 활동인지, 무엇을 바라면,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이런 뻔한 것을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들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이거 덕분에 안될 것도 됬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활동은 '장애학생 도우미'인데 이거는 아마 어느 대학교에 가도 있을 것이다.
늦깍이 대학생이었던 형님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이동 도우미'를 2년 정도 했는데 이거는 정말 잘한 것 같다.
사실 나는 그 때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장학재단에 소속되고, 공모전이나 교내외 활동들에 익숙해져서
장학금, 상금, 활동비등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
이 때 형님의 휠체어를 아침, 점심, 저녁 종종 밀어드리고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그 당시 나는 그 형님의 이동 도우미였지만 그 형님은 내 '인생 도우미'였다.
  
여담으로, 나는 한 번은 청각이 불편했던 예체능 계열 누나의 '수업 도우미'를 했었다. 

한 활동은 그 누나 수업에 같이 들어가서 타이핑을 해주는건데
공대생인 나에게, 대부분 여학생밖에 없는 예술디자인 대학의 패션디자인 수업은 정말 설렜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학기 밖에 안한게 너무 아쉽다. 

수업도우미는 학기가 끝나면 50만원의 활동비를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동도우미는 한달에 30만원씩, 한 학기가 끝나면 120만원을 받았다.
전부 기억은 안나지만 신입생 멘토링, 매그놀리아, 학교 홍보대사, 기숙사 문화멘토(기숙사비 지원), 런닝펠로우, Abeek 센터 활동등을 했다.


4. 댕기열, 그리고 응급실에서 간 면접

 


인도네시아 세마랑 고아원에서 2주간 자원봉사와 잠깐의 여행을 다니고 귀국하는 길에
환승을 하던 홍콩 공항에서는 나를 태우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귀국 중에 댕기열 증상이 일어났고, 승무원들이 
보기에는 내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을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몇개의 신체 테스트를 받고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나는 바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이틀 후인가 삼일 후에 장학재단 면접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여행을 가서 비어있던 학교 형님의 원룸으로 갔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신을 잃었고, 주변 대학에 다니던
친형이 찾아와서 아주대 응급실에 입원시켰다. 이 기억은 뚜렷한데 입원한 다음날 오전 9시가 면접이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퇴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형도 말렸고, 무엇보다 의사선생님이 말렸다. 우리형이 나에게 머라고 하길래
나는 이렇게 말했다. "2천만원짜리 면접"이라고, 형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게 최종면접이었는데 장학재단에 붙으면 나한테는 매학기마다 등록금과 백만원의 학업보조비가 나왔다.
건강보다 중요한거는 없다지만, 분명 내게는 중요했다.
다행히 재단에서 다음날 면접시간을 오후 늦게로 변경해주었고, 나는 면접을 보러갔다.

자기소개, 비전, 학업계획 등 면접관 여러명에 지원자 혼자보는 한시간정도의 면접인데
자기소개 부터 머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정확히 어떤 말을 한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5분만에 면접을 보고 나왔고, 몇일 내내 잠만 잤다.

다행히 면접에 붙었고, 3학년 1학기부터는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한 가지 원칙이 생겼다. '방학에는 일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기 중에는 꾸준히 알바하고, 대회나가고, 교내외 활동을 하면 
방학 시작할 때는 2~3백만원 정도 돈이 이었고, 이 돈으로 여행을 다니거나 데이트를 했다.  


이렇게 자존감이 넘치는 글을 썼지만, 사실 그 시간동안 나는 후회하는게 많다.
꾸준히 동아리 활동도 못해봤고, 힘들다면 찾아온 친구에게도 바쁘다는 핑계로 이야기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분명히 어느순간부터는 과하게 많은 활동들을 했었고,
필요한 만큼을 넘어 과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놓친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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